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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08일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첫작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인간'이다.
작업의 의미는 여러가지이다. 어느새부턴가 연애를 하기 위한 쉼없는 노력을 우리는 작업이라고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런 의미에서는 연애를 위한 첫 작업을 하는 순간부터 정말 '인간'인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만한 것 같다. '작업'이라는 단어를 쓰는 그 시점에 떠오르는 사람들의 연상은 그렇게도 달라진다. 그러나, 이 공간에 글을 쓰고 있는 순간부터 손가락과 더불어 생각을 시작하는 종류의 '인간'으로서의 '나'는 글을 쓰는 순간, 오로지, 나의 의지나 습관, 자연스레이 일어나는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실현되는 이 순간을 '인간'으로서의 내가 행동하기 시작하는 때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이 이해하는 글쓰기와 종교의 차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코자 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는 그런 시기, 공부나 학습이 마치, 여물 뜯어 먹고, 건장하게 밭 잘 가는 소처럼 사람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쉬이 연상되는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간간이, 내가 인간이고, 꿈을 꾸고 있고, 의지를 발현하며, 사회적 조건에 치이거나 생존과 생활이라는 화두에 사로잡혀, 살기 위해 공부하고, 살기 위해 학습하며, 그 삶을 조금이나마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사교하는데 집중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책도 읽어왔다. 공부와 책읽기는 학습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습은 학습이고, 책읽기는 책읽기였다. 책을 읽는 것은 또다른 세상을 여는 것이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상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 세계가 하나씩 열리고, 그 세계에는 내가 그 이전까지 경험하던 것과는 다른 인식의 방법이, 그리고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 숨겨져 있었다. 일면 같은 것들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책을 쓴 사람의 세계는 책을 읽는 사람의 세계와는 시공 자체가 다르고, 같은 시공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공 자체를 해석하는 방식은 판이한 것이다. 종교라는 세계도 명확하게 말하자면, 접하기 전에는 열려있지 않은 세계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말과 교리가 씌여 있는 경전에 접근하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의 나와는 전혀 다른 시공 안에 펼쳐져 있는 세계이며, 그 이전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경험의 방식의 일부는 공유하더라도 다른 세계의 모습을 전달한다. 모태 신앙이라는 방식의 종교전달은 종교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유아기 때부터, 바로 그들에게 습관을 입히고, 강요하는 방식이다. 마치, 그 세계가 그 어떤 경험이나 그 어떤 방식의 생각 이전부터 확고하게 있었던 것처럼 믿게 만드는 방식. 입고 있는 옷처럼, 삼시 세끼 먹는 밥처럼, 종교가 삶의 조건의 일부인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불행해지는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나름의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으니까. 그 집안, 그 가정에서 그 아이가 자기 생각으로는 쉽게 감잡을 수 없는 부모의 정체모를 미움이나 부정적인 반응에 상처입지 않고 자라나는 방법이라면, 또한 그 아이에게 그 이상 좋을게 또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글을 써보고, 다시 써보고 하는 과정 속에서 내 안의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어느 순간엔가 잃어버렸다. 신앙이라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결국 온전히 똑같은 무엇인가를 송두리째 내부에 지니는 것처럼 포장되고는 하지만, 마치 하나의 글을 각기 다른 사람들이 자기 방식의 집필 방법으로 써가는 것처럼 자기 방식의 과정과 자기 방식의 이해, 자기 경험의 경로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며, 그 신앙이라는 결과의 발현물도 그렇게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 신앙은 때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합리화 하는 절대선의 변명으로도 사용되며, 극단적인 집단주의 안에 자기 자신을 묻고 그 안에서 일종의 힘을 얻고자 하는 방식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그와는 다르게, 신앙에 입각해서 사회에 보다 많은 '선'을 가져오는 부분들도 있음에 반하여. 글쓰기는 일종의 팽창된 자의식을 가지고 글을 쓰는 시기의 청소년들에게는 하나의 종교적인 현상을 일으켜준다. 그 글을 정신없이 써가는 과정 속에서 극단적인 자기 도취에 몽롱하게도 만들어주며, 마치 내적인 기적을 체험하는 것과도 하는 자기 충족감의 감각도 일으켜준다. 정신없이 미친 것처럼 글을 써가는 몰입의 과정에서, 엄청난 분량의 글이 씌어진 순간, 기적과도 같은 자신의 놀라운 생산성에 환희에 차기까지 한다. 자기 세계의 확장에 대한 놀라움, 기쁨, 환희. 신앙인들은 바로 이러한 현상들을 종교 안에서 체험하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자기 세계 혹은 같은 신앙인들과 나누어 공유하고 있는 세계. '타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들과 확연한 차이를 갖는 세계를 자기와 일체화 시킨 바로 그 순간. 글을 열심히 쓰는 이들과 종교를 열심히 믿는 이들이 겹쳐지는 풍경 안에 같이 거하는 바로 그 시점이 나타난다. 물론, 종교를 믿으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개념도 있다. 종교의 경전을 쓴 사람들, 종교 소설을 쓴 사람들, 신앙고백을 일필휘지로 쓰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그러면, 그들은 그 순간 종교 안에서 얻는 안위와 자신의 창작을 통해서 얻는 안위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내 경험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두가지를 그대로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창작의 기쁨을 신앙의 기쁨과 동일시 하게 된 것이다. 마치, 책읽기를 논술을 위한 학습으로, 교과서나 참고서 읽기와 동일한 카테고리로 넣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창작 그 자체에 몰입하거나, 더 나아간 창작 그 자체의 세계를 집요하게 파악해나간 사람들은, 안다. 그 종교의 경전이 어떻게 만들어졌을 것인가를,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하나 가슴에 품는 신앙의 모습들은 또한 그 어떤 창작의 산물이라고 불러질 수도 있는 것인지를.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어느새부턴가, 꽤 오랜 세월, 내가 만들어온 세계가 이제는 그 어떤 특정 '종교' 집단의 내부에 가만히 합일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되었음을 느끼고 깨닫게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종교집단에 거한 사람이건 그저 자기의 색다른 세계와 더불어 거하는 사람이건 그 사람 역시 완전히 내 세계에 합일되거나 그 안에 송두리째 거할 수 있는 존재는 될 수 없다. 글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똑바르게 체험하고 확실하게 받아들인 이해와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 보다 세계에 대한 좀 더 철두철미한 이해로 한번이나마 글을 온전히 쓰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안다. 누구나 자기 스토리를 자기 인생이라는 어느정도의 바탕 그림이 있는 공간 위에 쓰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의 모습임을. 종교와 더불어 쓰던, 자기 자신 홀로 쓰는 것이라 판단하던. 그것은 그 인생을 살아가는 그 사람의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신이 당신에게 강림한 것도, 라블레의 귀신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뮤즈가 당신의 내부로 흘러 들어와서 쓰고 있는게 아니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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