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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6일
2 초여름 #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도어즈’라는 이름의 영화카페였다. 5월 초쯤이었나? 그녀는 가끔 들리던 그 카페에서 몇 년만에 나왔다며 사막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후로 가끔 그녀를 보곤 했는데, 그녀 때문에 더 자주 '도어즈' 를 찾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그녀와 마주친 날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끌렸던 첫인상은 차츰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도어즈’에서 영화를 가끔 보던 독립영화감독에게서 도와달라며 연락이 왔다. 남자배우중 한 명이 갑자기 출연을 못하게 됐다며 대신 출연해달라는 것이었다.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던 터라 선뜻 하겠다고 말해버려서 촬영 하는 날엔 해야할 일을 미루느라 진땀을 뺐다. 촬영지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혼자 소파에 앉은 채 30분 정도 대본을 보고 있으려니 차츰 지루해지기도 했고, 따스하게 비쳐오는 늦봄 햇살이 너무 좋아서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봤다. 그녀는 웨이브 머리를 핀으로 고정해서 올렸고,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갈색 드레스와 민소매 상의를 입고 있었다. 감독에게 여자 배우가 누군지 미리 듣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은 들뜨기도 하고 놀랐다. 사무실로 장소를 옮겨 영화에 대해 설명을 듣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녀와 대본을 들고 잠시 리허설을 했다. 그녀와 대면한 이후로 그녀 쪽을 잘 쳐다 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단편에서 카메라감독을 맡았던 친구는 그게 너무 어색해서 내가 그녀를 맘에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날 그렇게 영화 이야기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했다. 몇 차례 술을 따라 주고받은 후에 나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알게 되었다. 반찬을 치마에 조금 흘린 뒤 닦으러 화장실에 다녀온 뒤부터 혼잣말이 더 심해졌다. 조금 있다 다시 그녀가 화장실에 간 틈에 촬영을 맡았던 정태라는 친구가 감독에게 '원래 저러시는 분인가요?' 하고 물었고 나는 같은 질문을 눈으로 했다. 감독은 조금 망설이다가 오늘은 정도가 덜 한 거라고 했다. 그녀를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목례 몇 번 정도의 친근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감독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놀라기도 했지만 곧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짓는 표정없는 미소에서 묘한 기운이 묻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틀이 지난 후 첫 촬영지인 카페에 도착하니 몇 명의 스텝들이 먼저 와 있었다. 카페를 빌린 시간 안에 씬을 다 찍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익어갈 때쯤. 앞선 두 명 남녀배우의 분장이 끝냈고, 내 차례가 왔다. 스킨, 로션도 잘 안 바르고 다니던 내가 분장을 한다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있으니 나머지 스텝들과 함께 그녀가 도착했다. 그녀가 서둘러 분장을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그녀와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스텝들의 촬영준비를 도와주며 조금 기다리니, 그녀가 분장을 마쳤고 촬영을 시작했다. 나는 비중이 큰 역할이 아니었고 게다가 케릭터 자체가 선이 굵은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크게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희라는 여자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를 리드해서 무사히 첫 씬을 마쳤는데 촬영장비 설치에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점심을 뒤로 미루고 다음 씬을 서둘러 찍었다. 3시쯤에야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그녀는 밥이 많다며 나에게 덜어주었다. 조금은 특별한 의미인가 해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지만 무표정한 그녀 얼굴에서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10분이 채 안되는 영화 촬영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겠냐며 얕봤던 내 생각은 이미 첫 씬으로 사라졌다. 감독은 자신의 첫 필름영화라며 맘에 들지 씬들은 여러 번 다시 찍었다. 저녁까지 카메라와 장비를 세팅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 번 촬영이 시작되면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 모두들 조금씩 지쳐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촬영은 늦어졌고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원래 그날 계획했던 씬을 다 찍을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겨우 몇 번 본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우연인 것만 같지는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그녀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 지를 영화를 찍는 내내 생각해 봤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끌리기도, 또 다른편으로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런 내색도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카페에서 그녀와 연기했던 태수라는 다른 남자배우는 자기 씬이 이미 끝났는데도 기다리다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그녀가 담배를 찾을 땐 다가가 담배와 불을 건넸다. 처음에는 그런 그의 모습이 우둔하게까지 보였지만 차츰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워졌다. 둘째 날 촬영 때 그녀는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때문에 청순한 여자의 역할을 맡은 그녀는 머리를 풀고, 옷을 갈아입고, 분장을 했다. 분장을 끝내고 나니 그녀는 정말 시골 처녀처럼 변했고, 그것이 나를 조금 슬프게 했다. 술집에서 그녀와 내가 술을 마시는 씬을 끝으로 배우들의 촬영분이 끝났다. 스텝들은 배경촬영을 위해 촬영장비를 옮기고 있었다. 할일이 없어진 나는 분장을 지우고 있는 그녀들 뒤로 하고, 모두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빠져 나왔다. (헌터D씨의 작업+수정) [헌터D씨의 개인 위키 http://ost25.cafe24.com/ 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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