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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1월 23일
한국의 체온은 지금 32도 정도는 아닐까?
심적인 안정감을 얻는 길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얻는 안정감이 어떤 의미에서는 수많은 사회인들의 다종다양한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천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고용 안정이라는, 또는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인 세상에서, 그저 일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것은, 이제 '다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점점 더 '소수'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뭔가가 불안하여, 보험을 들고, 재테크를 하며, 둘 정도는 나아야 균형잡힌 발육 성장이 이루어지겠다 싶은 자식 농사도, 반으로 줄인다. 그렇게 하는 것마저 불안하여, 아이를 아예 낳지 않겠다는 부부들 또는 남편되는 사람, 부인되는 사람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2006년 1월 23일 현재, 우리들의 마음의 기온은 10여년 전의 온도에서 한 4-5도 정도는 내려가버린게 아닐까......아니, 나란 사람이 그렇게 차가움을 오래 딛고 있다가 결국 느끼는 온도 자체가 떨어져버린 것은 아닐까....... 급변하는 세계, 그리고 아주 잠깐의 방심으로도 추락할 수 있는 남극이나 북극에나 있다고 하는 엄청난 함정, 크레빠스들이 사방 팔방에 늘어서 있다는 느낌도 들 때가 있어, 우리는 더운 여름에도, 한겨울의 냉기를 느끼게 되기도 하고, 추운 겨울, 체감온도만큼이나 싸늘한 세상을 절절히 체험하기도 한다. 더이상, 타인을 좀 더 배려하고, 그럼으로써, 사회를 보다 푸근하게 만들고, 그 푸근함에 자신의 삶도 심정적으로나마 안정되는 그런 스토리를 내심 깊숙히 납득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 내지는 그 어떤 보통의 사회인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아이디어들을 잡은 사람들의 범위를 벗어나면, 영영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스토리들에 완전히 흠뻑 빠져들지는 않는다. 스토리를 접한 후라도, 10분 정도면, 보일러 꺼진 방의 차가움을 맨발로 디디는 현실에 서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어디까지나 얼음장 같은 공간이다. 보일러 꺼진 방안에서도, 그렇게 완전히 얼음판이 다 된 방안에서도, 사람들은, 훈훈한 감동과 가족간의 사랑이, 그리고 홀로이더라도 희망이 있는한 사는 그 자체가 즐거울 수 있다는 아름다운 환상을 공유해보고 싶어하지만, 그런 환상은 어디까지나, TV에서 나오는 하나의 엽기적인 사건만으로도, 홀연히 깨져버린다. 발발이의 추억 의혹을 갖고 매스컴을 쳐다보다보면, 갖은 음모론들을 상상해낼 수 있다. 사회가 흉흉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바로 그러한 공방의 순간들이 생기고, 전국민들이 뭔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어떤 진실이라는 것을 캐보려할 때쯤에는 마치 그러한 순간들을 파도가 모레 쓸어가듯 쓸어버리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매스컴 앞으로 달려들고는 한다. 사회상이 난맥상일 때, 자연스럽게 어떤 아노미적인 혼란으로 형성된 범죄나, 혼동 그 자체가 벌어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생노병사와도 같은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발발이라는 범죄자는 10년간 꾸준히, 그 시기의 경제나 정치가 좋았건 나빴건 상관없이, 자기의 생활 패턴을 그대로 고정하고, 그 밖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마치, 어떤 일에 일상적으로 반복하여 집중하듯이, 타인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들을 태연자약 해왔다. 대중은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자신의 윤리관과 비교하여 한참은 먼 그 존재를 자기와 비교하며, 모종의 안심을 한다. 그리고, 함께 욕하는 대열에 끼면서, 어떤 종류의 동류의식이나 만족감을 나눠가진다. 나는 대중이며, 그것과 별반 다름없는 행동 양태를 갖고 있다. 같이 욕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의 그 어떤 마음의 평안함. 또는 심적인 안정감. 나는 적어도 함께 욕하고 있는 그들과 동류이며, 동류 아닌 것들과 비교해서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느정도 썩 괜찮은 사람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미움 받을 짓은 하지 않고 있다. 이런정도의 안정감도 없이 살아가기는 정말로 힘들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세상 말세다라고 말하는 상황의 틈새로 떨어진 범죄자나 사회 또는 특정한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뭣한, 스스로 말하길, 최초에 자기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여자에게 범죄를 저지른 이후부터 일종의 방아쇠가 당겨져, 아무런 죄책감없이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발발이 (발바리가 맞춤법에 맞겠지만, 그냥...나도 모르게 나자신 끈질기게......) 자신이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자신을 그런 강간범으로 만들어왔을거란 생각을 해보자면 끔찍하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모욕하고 더럽힌 그 오랜 시간들이 너무도 끔찍할 따름이다. 사형 반대론자의 계열에 스스로 몸담았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던 나이지만,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그 사람은, 그러한 범죄를 계속할 수 있는 상태로 사회에 다시 나와서는 안될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버린다. 설사 개과천선했다라고 하더라도, 그가 형무소에 있는 것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이라는 의문을 표시하며, 어떤 심판자의 입장에서 그 발발이를 어딘가에 쳐박혀 비굴하게 찌그러져 있는 존재로 생각해버린다. 그러고나면, 적어도, 저녁 식사를 먹는데 있어서 소화 기관은 쾌활하게 움직여주니까. 나의 모종의 분노와 심판의 목소리, 그리고 비분강개한 듯이 쓴 글들은 나의 활력으로 바뀌어진다. 데스노트는 그러한 활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만든 만화이다. 그렇다, 누구나 궁국의 심판자로서의 활력을 원한다. 궁국의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순간순간 상상해 본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권력이 없으면, 그만한 권력이 있(을거라 믿어지)는 자의 판단에 자기자신의 판단과 정의를 일치시켜서, 그와 동일하거나 그와 동류로 생각되는 '자신'에 대한 반영으로부터 얻는 활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반대로 누구나 인정하고 어떤 모종의 권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의 판단이나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존재가 갖고 있을만한 위상을 어떻게든 추락시킴으로써,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빠순이, 빠돌이, 또는 까돌이, 까순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다'. 종교만큼 그 '살아가는 힘'을 명확하게 전달해주는 시스템은 또한 어디에 있는가? 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신에 기대어서 그 누구라도 심판할 수 있다. 나 혼자만으로 심판이 당장 눈앞에서 잘 안되면, 같이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심판의 행위를 직접 해내면 된다. 그럼으로써,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지킴으로서 얻는 자기 행복이 아니라, 나 또는 우리와 이분화 되는 '타인'을 배척하고 심판하고 처단함으로써 얻는 치졸한 쾌락에 가까운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한다. 그곳에는 명확히 아무런 사회적인 긍정도 없고, 개인적인 고양도 없다. 마치 게임머니를 내면서 수없이 게임을하고, 수많은 상대자들과의 순위 변동을 체크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투쟁하고 싸우는 하나의 꼬리물기 시합이 뫼비우스 띠를 따라 돌아가듯이 계속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무한 루프로 미움과 배척과 따돌림과 벽쌓기, 타인에 대한 모욕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모욕감을 느끼는 순간이나,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자존심 또는 자부심의 소유자가 서서히 무너져갈 때, 그들은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동시에 얻는다. 데스노트는 타나토노트라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SF소설을 나에게 떠올리도록 만들어준다. 끝에 노트라는 말이 붙는데도 이유가 있지만, 다름아닌 '타나토스', 죽음의 본능이라는 문구를 나에게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타인이나 자신을 생명력과 자기 존엄을 잃은 존재로 만드는데, 죽음 이상의 수단은 없다. 죽음과도 가까운 수치나 고통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인간을 무화 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데스노트는 단지, 그 노트에 죽어야할 사람의 이름을 그 사람의 얼굴을 아는 상태에서 적어 넣는 것만으로 죽음을 바로 그 지명된 사람에게 선사하도록 되어 있는 죽음의 세계에서 온 사신의 노트이다. 무한루프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방명록이나 게시판을 사용하여, 이른바 좀 잘 나가는 것 같은 사람 또는 불특정의 타인들을 죽음과도 같은 무화상태로 만들고 싶어하는 이른바 '악플러'들은 이 넷공간을 마치 '데스노트'로 쓰고 싶어하는 것만 같다. 그들이 적어 넣는 말들로, 그들은 그들이 지명한 사람을 죽음에 가까운 수치나 고통, 무화감 속으로 밀어넣고자 열심히 애쓴다. 그 일을 위한 자기 자신의 시간이 얼마든지, 마치 영원이랄 정도로 있는 것처럼. 그러나 만화에서는 적어도, 그 사신의 역할을 자처하게된 인간계의 소유자는 엄밀한 원칙 하에, 지구촌을 더럽힌 범죄자들만을 데스노트에 적어 넣는다. 엄격하고, 공정하고, 그리고 뜻깊은 '사신'의 노릇을 하고, 별로, 크게 원치는 않겠지만, '존경 받고 싶은 악플러'들이 계신다면, 그냥 이 '데스노트'는 좀 보고 나서 악플들을 달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칙 없는 '악플'은 그냥 '자살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조금만 안다면, 그런 일들을 하고 다니지 않을 터인데. 그렇게 타인을 상처주고, 결국에는 자기 존재도 무화되어 버리는 그런 길들을 따라다니지 않을텐데. 그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이 순간에 그 에너지의 보존과 확장을 위해서, 단지 그 찰나의 '망가뜨린다'는 파괴의 쾌감에 순간순간 놀라운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런데, 그 '악플'이 정말로 존재감 있고, 타인들로부터도 인정받을만한 '명문'이 되려면 명확한 자기 원칙을 피력하고, 이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닿는다면, 그런 시시한 쾌감에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작위의 '악플'은 명확히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건 그 악플에 닿는 상대방들과 자기 자신을 죽음과도 같은 무화 상태로 쓰는 내내 밀어넣는 행위일뿐이다. 그건, 데스노트에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 이름을 적어넣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악플러의 꿈 데스노트. 공통의 규준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이 세계는 화해와 평등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야수적인 전투와 권력 투쟁과 단순한 심리나 본성에 대한 자극으로 버텨가는 세계로 나날이 퇴행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길었던 역사나 문화의 축적, 학문적 융성, 정보의 촘촘한 체들로 범벅이 된 지구, 넷으로 연결된 지구가 더 다양함을 인정하고 더 많은 인간사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서 가고 있다는 확신을 과연 누가 대중에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와서......
데스노트는 이러한 생명연장에 거는 희망과는 다른 죽음의 본능과 맞닿는다. 마치 파우스트 박사가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 짧고 굵게 사는 인생을 요청했던 것처럼, 책속의 주인공은 인간계로 우연히 내려온 동물적인 야성과 인간성 약간씩을 가진 사신으로부터 그 명부를 받고, 다소 체계적인 공식으로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인류의 사회 정화를 시작한다. " 처벌받지 않고, 매스컴을 통해서 유유히 그 범죄 성과가 나타나기만 하는 범죄자들 "을 TV에서 골라낸다. 그리고, 매스컴을 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는 그 어떤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더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세계를 향해 살포한다. 그럼으로써 원하는 것은 "모범생인 자기 자신과도 같이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만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마치 DNA의 확장의 새로운 발현을 보는 것과도 같다. 자기자신과 같은 존재를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더 많이 낳게끔해서 확장시키려는 본능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아이디어를 갖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확장시키고 이에 맞지 않는 자들을 과감히 처단하는 능력. 기존에 우리가 보아왔던, 전세계를 통해서 벌어지고 있는 악플러들의 집단 린치의 향연들의 은근한 목적은, 악플의 대상이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자기 말살 상태로 매스컴으로부터, 물론, 인터넷으로부터도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 정화적인 능력이 있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한 내용도 나타나지만, 본질은 '자기와 같지 않은 자', '자기와 같은 아이디어나 생활환경', '삶의 양식'이 같지 않은자들을 과감히 처단하고자 하는데, 그들의 힘은 집중되어 있다. 이미, 그 집단 린치 과정의 중간에는 그렇게 린치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가정은 사라져 있다. 데스노트라는 만화는 그러한 점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일단, 데스노트에 적어 죽이는 그 행위 자체가 거창한 공적인 목표인 '사회정화'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데스노트의 소유자의 인격은 극도의 이기주의로 향해 치닫으며 그 인간성은 거의 말살되어 버린다. 딱히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자기 일에 방해되면 죽이며, 자기 목적에 맞으면, 무고해도, 이름을 적어 버린다. 혹, 실수로 적어서 죽였어도 죄책감은 전혀 갖지 않는다. 곧, 악플 자체를 달 수 있는 '건 수'가 있는게 중요한 것이지, 악플을 정확히 달아야만 하는 그 이유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악플'의 쾌감에 절절히 젖어 있는 것이다. 적어도 40%의 악플러들은 집단 린치의 쾌감과 상대방이 얼마나 자기보다 못한 존재인가를 스스로 어떻게든 납득하고자 하는 작업에 온 정열을 기울인다. 그 얼마나 자기가 저열한가를 스스로 드러내는 그 자체 아니던가. 그렇게 안 하면, 남들이 훌륭하다는 말도 잘 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는걸 절절히 드러내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한다. 데스노트의 주인공과 악플러들이 또한 갖고 있는 중요한 공통점은 자기자신의 정체성이 자기가 린치를 가하거나 죽음을 선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신변이 안전하다는 그 상황에서 그들은 아귀처럼 덤벼든다. 물론, 어떤 바보들은 완전히 냉정을 잃어버려서 자기 신상의 정보가 다 드러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악플을 멋드러지게 단다. 이 경우는 이미, 자존심이나 이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웹상을 떠도는 허깨비에 이른 경지가 되어버린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이미 악플러가 아니라, 악귀라 불리울 수 있는 존재 그 자체다. 오프라인에서 한번 발로 걷어차여야만 정신차리는 그런 유아이다. 그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또하나의 공통점은, 타인에게 자기 정체를 밝혀서 공공적으로 인정받거나 존경 받고자 하는 그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그 누구로부터도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는 그 경지까지 가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길 포기한 존재들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사회 정화적인 작용을 그나마 아무런 사심없이 의식/무의식 중에 하는 사람들로 분류될만한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그나마 상대방을 죽이고 밟아 마음 속으로나 자기자신의 위상을 보다 높이 올려보겠다는 그런 생각은 없다. 적어도, 상대가 자기가 불쾌해하는 행동은 이제 더이상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정도의 판단을 내리거나, 자기가 불쾌해했던 점이 오해일 수도 있다는 힌트를 받으면, 그 행동을 그만둔다. 왜냐면, 그곳에는 악플에 바로 쓴 그 내용을 떠난 다른 사심이나 어떤 의도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수하고 순진한 악플러들과 고약한 의도와 불신감, 악의로 똘똘뭉친 악플러들이 게시판을 잔뜩 구성하고 있다. 학력의 높낮이도 파악되지 않으며, 성장 환경도, 사회적인 활동도 전혀 그 글들만 보아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만화 데스노트의 주인은 일류급의 엘리트의 고상한 환경에서 고생이란 것 전혀 경험한 적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만약, 데스노트를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이 소유했다면, 자기 자신의 부나 권력, 명예를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곁들여져 나온다. (이건 솔직히 납득할만한 근거제시가 조금은 희박한, 만화 작가의 편견이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보다 더한 부의 욕구와, 권력, 명예욕이 뻗어나온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꺽고 있다. 아마 그 만화 작가 자체가, 유복한 엘리트이거나, 유복한 엘리트 자체를 선망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엘리트와 동떨어진 사람들로부터 경험적으로 피해를 많이 보았거나) 악플은 자기가 속한 환경에 대한 불만만으로 다는 것이 아니다. 보다 더 큰 이유는 자기와 지나치게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못 참기 때문에 다는 것이다. 악플러들은 사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살아온 환경에 많은 문제를 지닌 사람들이 흔히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 어느 계층으로부터도 악플러들은 등장한다. 다만, 그들이 그나마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오프라인에서 어떠한 의식을 갖고 사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인가이다.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인정하는 다양성의 테두리에서 자기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면, 악플러가 되지 않는다. 악플러가 되더라도, 인정받을 수 있을 길은 공평무사한 악플의 원칙을 자기 자신 명확하게 말할 수 있고, 타인에게 그 원칙의 공명정대함을 언제 어느때라도 어김없이 말할 수 있는 약간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자기자신에게도 악플 달만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달아야 한다는 류의 원칙은 아니다. 데스노트라는 만화가 보여주고 있는 매력적인 사신대행의 역할은 '그나마 올바르게 이기적'인 것이다. 이 '사회를 위한 것'을 자기 이익의 범위로 포함시켜, 동일시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사회를 위해 자기 희생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나의 이익에 분명히 이 사회의 이익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익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이익이 명확히 손상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만 사신대행은 죽을 사람으로 그 사람 이름을 적고 악플러는 마땅히 악플을 달아야 할 것이다. 다만, 자기와 많이 다르다라는 그 사실 하나만이 맘에 들지 않아 죽을 사람의 이름을 적고, 자기 반영의 확장을 위해서 집요하게 악플다는 말 그대로의 악귀들은 좀 사라져주었음 한다. 사람 생명 하나 죽이는 정도의 중요한 일들이 당신이 다는 말들 하나 하나를 통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마 해보라. 데스노트를 한번 보라. 심판자로서의 무게를 좀 느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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